고토 후미오 (메이지 시대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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고토 후미오(일본어: 後藤文夫, 1884년 3월 7일 ~ 1980년 5월 13일)는 다이쇼·쇼와기의 관료이자 정치가로, 오이타현 출신이다. "천황폐하의 경찰관(天皇陛下の警察官)"을 자칭한 신관료(新官僚)의 대표라고 볼 수 있다. 자식으로는 법무대신을 지낸 마사오가 있다.
약력
[편집]서력 | 일본의 연호 | 내용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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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08년 7월 | 메이지 41년 |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|
1908년 12월 | 메이지 41년 | 내무성 관료가 됨 |
1922년 6월 | 다이쇼 11년 | 내무성 경보국장(警保局長) |
1924년 9월 | 다이쇼 13년 | 대만총독부 총무장관 |
1928년 | 쇼와 3년 | 대중불경사건(台中不敬事件)으로 총무장관 사임 |
1930년 12월 | 쇼와 5년 | 귀족원 칙임의원(勅任議員) |
1932년 1월 | 쇼와 7년 | 국유회(國維會)를 고노에 후미마로 등과 함께 발기, 이사가 됨 |
1932년 5월 ~ 1934년 7월 |
쇼와 7년 ~ 쇼와 9년 |
사이토 내각의 농림대신 |
1934년 7월 ~ 1936년 3월 |
쇼와 9년 ~ 쇼와 11년 |
오카다 내각의 내무대신 |
1936년 2월 | 쇼와 11년 | 2·26 사건으로 내무대신 관저를 습격당하지만 외출 중이어서 무사 오카다 게이스케 총리의 소식이 불명확했기 때문에 이틀 간 내각 총리대신 임시대리를 맡음(총리는 생존) |
1941년 8월 | 쇼와 16년 | 대정익찬회 중앙협력회 의장 |
1942년 6월 | 쇼와 17년 | 대정익찬회 사무총장 |
1943년 4월 | 쇼와 18년 | 대정익찬회 부총재 |
1943년 5월 ~ 1944년 7월 |
쇼와 18년 ~ 쇼와 19년 |
도죠 내각의 국무대신 |
1945년 12월 | 쇼와 20년 | A급 전범으로 지명되어 스가모 구치소에 구치 |
1948년 12월 | 쇼와 23년 | 불기소로 석방 |
1953년 4월 ~ 1959년 6월 |
쇼와 28년 ~ 쇼와 34년 |
참의원 의원(오이타 지방구大分地方区, 료쿠후카이緑風会) |
1980년 5월 13일 | 쇼와 55년 | 사망. 향년 97세(만96세). |
참고 문헌
[편집]- 内政史研究会 <後藤文夫氏談話速記録> 1968年7月11日 <内政史研究資料> 4号
전임 야마모토 데이지로 |
농림대신 1932년 ~ 1934년 |
후임 야마자키 다쓰노스케 |
전임 야마모토 다쓰오 |
제53대 내무대신 1934년 ~ 1936년 |
후임 우시오 시게노스케 |